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관리 메뉴

시간의재

열차 본문

단상

열차

물고기군 1995. 10. 1. 23:32

많은 것들이 예전과 달라져 버렸다.
6주간의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밤 열차를 탄다. 설핏 잠이 들었을까, 깨어서 창 밖을 내다보니 열차는 멈춰 있었고, 아직도 어둡다. 같이 눈을 뜬 옆자리의 동기가 불안을 담고 묻는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지?"
나도 모른다. 그 친구와는 사단 보충대에서 헤어졌다.
참고로 얘기하면 지금 나는 강원도에 있다. 최전방, 서울로 가는 길보다 북한 땅으로 가는 길이 더 가깝다. 그렇다해도 여전히 내겐 두 곳 다 너무 먼 곳이다. 그리고 이제 일주일 뒤 나는 일병 계급장을 달 것이다.
'힘들어?'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힘들었어?'라고 묻는다면, 글세... 웃어버릴지도 모른다. 다 그렇다. 힘들었던 일도 즐거웠던 일도 지난 일은 다 똑같다.
자대전입 일주일 후 나는 첫훈련을 받게 된다. 13kg 짜리 포판을 군장에 얹고, 몇 개의 고개를 넘었다. 단지 몇 개의 고개일 뿐이다. 근데 어쩐지 '몇 개'의 고개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쓴웃음이 난다. 훈련장 앞 마지막 고갯길에서 선임병이 내 철모를 받아 주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훈련이었다. 아마 오래 전에, 그가 이등병으로 첫훈련을 뛸 때, 누군가 그의 철모를 받아 주었는지도 모른다.
자대에서 어머니께 첫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나는 어느 소설가의 표현을 빌려 이곳에선 햇빛만은 언제까지나 공짜라고 썼다. 며칠째 비만 내리다 맑게 갠 날에 내 볼에 닿는 햇살은 축복이었다. 그런 날에는 하나밖에 없는 자대 동기와 담배를 피우며 구름그림자가 선명하게 진 산마루를 올려다보았다. 바라다보는 산은 참 멋지다. 하지만 이제 산을 바라다만 볼 수는 없게 됐다.
산은 고지가 되었다.
그 고지에 군장을 메고 올라갔다. 고지의 정상에서 지쳐 앉아 있던 내 옆에 이제 막 분대장 견장을 단 선임병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이등병 시절을 흐린날 희미한 산등성이처럼 띄엄띄엄 얘기했다. 일병을 갓 달게되는 자신의 바로 윗 선임병에게, 이제 일병을 달게되고 그래서 P·X를 자유롭게 갈 수 있게 되면, 가장 먼저 포카리스웨트 하나만 사달라고 부탁했었다며 웃었다.
그랬다. 이등병 시절 우리는 항상 목이 말랐다. 한밤중에도 자다가 깨어 세면장의 물을 벌컥 벌컥 들이 마셨다. 그것은 타는 듯한 갈증이 아니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목마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우리에게 못된 주술을 걸어놓은 기분이었다.
물을 마시고 다시 누워도 한 번 깬 잠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불침번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서울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들은 참 멀리 있다. 가끔 그들이 나를 잊어버린 건 아닌지, 불안해했다.
다음날, 나는 서울로 전화를 한다. 전화를 걸어도 그들과 나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알겠다. 서로의 안부와, 금방 꺼져버릴 웃음만을 만들어내는 시시한 농담 몇 마디, 전화를 끊고 돌아서면 안도의 한숨을 쉰다. 왜일까?
그들의 생활은 내게 낯설다. 6개월 전의 내 모습이 내게 낯설다.
군복이 어울리는 것 같아? 라고 선임병이 내게 물었다.
그 때 나는 중대장에게 전입신고를 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다시 복장을 점검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거울을 보고, 군복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느껴질 때 진짜 군인이 되는 거라고 그는 말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앞으로 남은 생동안 내가 이등병 시절을 다시 한번 겪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자신이, 이 정도면 충분하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고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어느 날 문득 창문을 여니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하나의 계절이 가고, 다른 계절이 왔음을 깨닫는 것뿐이다.
얕은 잠에서 깨어나 내다 본 창 밖, 가로등 불빛에 붉게 물든 그 황량한 새벽역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벌써 4개월 전의 일이다. 나는 친구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열차가 멈춰 선 역은, 성북역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강원도까지 왔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건, 4개월 전의 그 친구의 물음이 문득 다시 내게 던져진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4개월 전의 그 열차다. 친구가 불안을 담고 묻는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지?'
나는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4개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나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 아마,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 때는 어디로 가는 거냐고, 아무도 묻지 않을 테고, 설혹 묻는다해도 대답할 필요조차 없어지겠지. 모든 게 다 그래. 우리가 뭔가를 알게 되었을 땐, 이미 늦어버리고, 모든 게 쓸모없어진단 말이야.'
나는 눈을 감는다. 달리는 열차의 규칙적인 흔들림이 다시 나를 재워줄거라 믿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오는 날의 산보  (0) 1998.10.02
우중버스  (0) 1998.10.01
다정함  (0) 1998.08.13
왜 그랬니?  (0) 1998.07.29
접속사적인 휴식  (0) 1998.06.29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