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우중버스 본문
비오는 날엔 버스를 타는 버릇이 있어. 언제부터였던가, 하긴 내가 일상적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던 때는 재수때였으니까 그 시절부터였을거야.
오후 5시까지의 학원수업이 끝나고, 낡고 좁은 목제책상에 앉아 성문종합영어 한 시간, 정석한 시간, 그리고 몇 가지의 문제지들을 풀다보면 10시가 되고 야간 자율학습도 끝나고 - 몇개피의 담배꽁초를 화장실 환풍구를 통해 버리고, 싸구려 자판기 커피도 한두잔 마셨지 -오래도록 바라보면 이유없이 서글퍼지는 매일같은 풍경, 하루의 끝에 복도를 빠져나가는 재수생들의 긴 행렬에 파묻혀 밖으로 나와섰지.
그날은 비가 내렸어. 봄비였지. 서늘한 바람이 옷속을 파고들고, 양팔을 비벼대며 아 춥구나 싶어도 정확하게 말하면 여름이 시작되기전 마지막 봄비였어. 버스정류장까지는 뛰어간다해도 버스가 올때까지의 시간동안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난감할 정도의 빗방울이 가로등 불빛속에 선명하게 보였어.
다행히 정류장 앞 가게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했고, 눅눅한 담배한대를 다 피울 때쯤 버스가 왔고, 젖은 옷과 우산들을 헤치며 올라탔어.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지. 버스 안은 온통 비냄새로 가득 차 있었어. 비릿하고 습습한 냄새. 몇 번이나 내 옆에 선 사람의 젖은 우산에 바지가 젖으면서도 난 아무말도 안했지. 유리창엔 하얗게 서리가 껴 있어서, 바깥은 그냥 붉고 뿌연 불빛밖에 보이지 않았지. 난 손바닥으로 창을 닦아내고, 바짝 얼굴을 붙이고 거리를 바라봤지. 비에 젖은 건물, 불빛에 붉게 물든 아스팔트,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어둔 그림자의 사람들, 창을 통해 바라본 사물들은 한결같이 흐릿하고 반짝이는 햐얀 빛무리로 둘러싸여 있었어.
그건 기억처럼 먼 풍경이었어. 모든게 지나쳐가고, 멀어져서 다시 보지 못할 풍경이었지. 마치 막 잠이 들기전에 떠오르는 생각들처럼, 일그러지고 알 수 없는 빛깔에 물든 세계였어.
비가 왔고, 수업이 끝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어. 서점에 들러서 책도 한 권 샀고. 음악테이프도 하나 샀지. 비오는 날에 버스를 타고 거리를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거리가 똑같이 보여. 내가 처음으로 비오는 날에 버스를 타던 재수시절부터, 지금껏 비가 올때마다 버스를 타고 보았던 수많은 거리들이, 아마 버릇인게지. 나쁜 버릇인거지.
다 잊어버려, 모든 건 끝났어. 정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