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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여름밤의 꿈 본문

단상

여름밤의 꿈

물고기군 2001. 7. 5. 18:42

나는 음악에 대해서 잘 모른다.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음악시간 때면, 악보를 잘 읽을 줄 몰라서, 미리 음계를 직접 행간에 적어두곤 했다. 한 칸 한 칸 손으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꼽으면서 꽤 긴 노래 전부의 음계를 기입하는 것은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곧잘 음악선생은 무작위로 학생을 일으켜 세워서 음계로 노래를 시키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음악을 전문적으로 듣는 것도 아니었다. 가령 고등학교 시절 내가 아는 녀석은 락 매니아여서 락커들의 이름을 줄줄 꾀고, 그 가사까지 다 해석해서 따라 부를 수 있었다. 클래식이든, 재즈든, 어느 것에도 나는 그다지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음악 듣는 것을 참 좋아한다. 술이라도 잔뜩 마시고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언제나 택시기사에게 라디오를 틀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듣는 음악은 근사하다. 도심의 새벽 거리는 텅 비었고, 나는 택시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있다. 걱정할 것은 없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김현식 4집을 내가 처음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재수 때였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녀석의 집에서 처음 그 음반을 들었다.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재수 때는, 하루가 멀다하고 들락거렸던 집이었다. 아마 그 때는 김현식의 노래 중에, '내 사랑 내 곁에'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을 때로, 그 노래는 6집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김현식 4집은 그다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음반은 아니었다. 4집은 실제 1988년도에 발매되었다.

음악사적으로 김현식 4집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잘 모른다. 또 이제는 신중현, 유재하 등과 함께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뚜렷하게 자신의 족적을 남긴 인간 김현식과 관련되어 4집이 그의 어떠한 시기에 만들어진 음반인지도 모른다. 가령 그가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인지, 아니며 후인지, 또는 그 때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는지 어쨌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4집이야말로, 음악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지만, 내 스스로 대중음악사에서 최고라고 여기는 음반이라는 것이다.

재수 시절, 나와 내 친구는 곧잘 여자에게 직접 녹음한 테이프를 선물하고는 했다. 그런 테이프 선물은 여자의 호감을 얻는데 의외로 잘 먹혀들었는데, 그에 비해 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알맞았다. 시간이야 조금 걸리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재수생에게 시간은 거의 무한정으로 있었다. 그 때 꼭 빼놓지 않는 노래가, 김현식 4집에 수록된 '언제나 그대 내 곁에'와 '여름밤의 꿈'이었다.
김현식 4집에 수록된 노래 중에, 그래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노래들로는, 앞서 말한 '언제나 그대 내 곁에', '사랑할 수 없어', '그대 내 품에(이 곡은 유재하의 곡으로 나중에 그 자신의 음반에 실려서 더욱 유명해진 곡이다)', 하모니카 연주곡 '한국사람(이 곡은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한 6집에 다시 수록되었다)', 그리고 '여름밤의 꿈'이 있다.
이 중에서 '여름밤의 꿈'은 지금은 거의 중견가수가 된 윤상이 고등학교 시절 만들었다는 곡으로, 그에게 천재 작곡가라는 별명을 붙여준 곡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 '여름밤의 꿈'을 들어보면 과연 고등학교 때 만들었을 법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것은 그 곡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곡 자체가 맑고 순수하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곡은 노래방에 없다. 대신 '언제나 그대 내 곁에'가 있어서 여자와 단 둘이 노래방에 가게 되면 빠트리지 않고 꼭 부른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실제로 경험한 것처럼 머리 속에 선명하게 이미지를 만드는 것들이 있다. 내게 '여름밤의 꿈'이 그렇다. 이 노래를 듣기 전까지 나는 '여름밤'에 대해 특별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있다 해도 그것은 어린 시절 시골집에 놀러갔을 때, 마당에 피우던 모킷불이나, 평상에 앉아 욕심 사납게 한 입 가득 베어먹던 수박, 밝은 전구 주위에 모여드는 날벌레 그림자 정도다. 물론 그건 그 나름대로 소중한 기억이다. 그런데 이 노래가 주는 이미지는 그것과는 다르다.
뭐랄까, 아주 커다란 유럽풍의 성이 있고, 잘 손질된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이 있고, 직접 악단이 연주하는 부드러운 음악이 있다. 그것은 한껏 고양된 시끌벅적한 파티는 아니다. 모인 사람들은 이미 그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여야 좋다. 그래서 거기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나 은근한 친밀감이 존재한다. 나는 한 손에 술이 담긴 유리잔을 들고 있다. 부딪히면 아주 맑은 소리를 내는 유리잔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청년이다.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그렇다해도 세상의 경험은 아직 신기하고 즐겁다. 모인 사람들 중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고 나처럼 젊은 사람도 있다. 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불빛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걸어간다. 풀잎에 맺힌 밤이슬이 발목을 젖게 한다. 숨을 들이쉬면 이슬에 젖은 싱그러운 풀냄새가 난다. 혼자라도 좋지만, 은근히 누군가 나를 따라와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따라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무리 중에 있다. 그래서 문득 내 등뒤에서, '여기서 뭐해요?'라고 물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나는 그러면 깜짝 놀란듯이, 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라고 말할 것이다. 아니다. 그냥 혼자가 좋다.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일이 진행되면 재미가 없다. 그렇다. 나는 그곳에 혼자 서 있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저 나를 따라와 주었으면 하는 그녀를 생각하고, 아니면 여름밤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주위는 고요한데, 간혹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여름밤은 깊어간다.
어쩌면 이 이미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 여름밤의 꿈'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그 희곡 말이다. 하여간 '여름밤의 꿈'은 내게 그러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여름밤의 꿈'의 후렴구는 이렇다.
* 부드러운 노래 소리에 내 마음은 아이처럼
파란 추억의 바다로 뛰어가고 있네요
깊은 밤 아름다운 그 시간은
이렇게 찾아와 마음을 물들이고
영원한 여름밤의 꿈을 기억하고 있어요
다시 아침이 밝아와도 잊혀지지 않도록

최근에 이 노래는 여러 가수들에 의해서 리메이크 되었는데, 김현식 헌정앨범의 조성모가 처음이다. 바로 그 다음에 이어서, 최근 발표한 7집에서 김건모가, 그리고 직접 노래를 만들었던 윤상이 자신의 베스트 앨범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 나는 모두다 소리바다에서 다운받아 들어보았는데, 뭐라해도, 최고는 역시 김현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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