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화요일, 종로, 빈 어깨, 문장 본문
화요일, 이번 학기 내내 내게 화요일은 공휴일이었다. 수업도 근무도 없다. 이번 학기 내내 화요일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학교 도서관에 자리를 잡으리라 맘먹어더랬다. 내게 몇 번의 화요일이 있었는지... 한번도 학교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 본 적이 없다. 월요일 저녁마다 술자리가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일찍 집으로 돌아온 날에도 다음날에는, 화요일에는 어김없이 늦게 잠에서 깨어났다. 일단 하나를 포기하면, 전부 다 포기하게 된다. 악마와 거래를 시작하면, 다 잃든, 다 얻든,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대개 다 잃고 말지만. 그래서, 늦게 일어난 날에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약속도 없고, 전화도 없고, 해야 할 일은 언제나 산더미 같지만 의무감도 없고. 이번 학기도 끝이 났다. 그렇게 해서 2000년 봄에서 여름까지의 내 언제나 공휴일이었던 화요일도 끝이 났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나이를 먹고, 나이를 먹을수록 잃어가기만 한다. 고요한 화요일.
오늘은 책을 사러 가야 했다. 어제 저녁 강남역의 대형 서점에서 구하지 못했던 책을 사러 시내로 나가야 했다. 교보문고는 천장의 거울 때문에 어쩐지 번잡하고 마음이 불안해지는 탓에, 시내에 나가 책을 살 때는 영풍문고를 이용하곤 했다. 오후 다섯 시쯤, 집을 나섰다. 원래는 오전 중에 갔다오기로 생각했었는데, 화요일의 주술은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무기력함의 우물 속으로 빠트렸다. 출렁대는 늦잠과 늑장부리기. 이 도시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장소는 전철역이다. 아무리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 북적대는 것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화가 날 정도다. 출퇴근 시간이라면 차라리 낫다. 나는 도무지 출퇴근 시간이 아닌 시간대에 그렇게 많은 인간들이 전철 안에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들 모아서 당신들은 대체 이 시간에 왜 전철을 타는지 물어보고 싶다. 늑장을 부렸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원하던 책을 뽑아들고 딱히 찾는 다른 책도 없으면서 서점의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안내 데스크에 가서 예전에 품절이어서 구하지 못했던 책을 시험삼아 물어보았다. 여전히 품절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출판사에서 그 책을 출판하지 않는다는 거죠?' 여자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또 몇 년이 지난 뒤에, 나는 또 그 책을 찾으려 할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건 내 성격이다. 가끔 내가 평생 그 책을 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 이상한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다시는 출판되지 않는 책은, 어쩐지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언제까지 죽은 책들을 찾으러 다니는 바보짓을 해야 하는 걸까? 아직도 출판되고, 대형 서점을 가득 메운 저 많은 책들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어딘가 누군가의 집 서가에는 그 책이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얌전하게 꽂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 흐뭇한 일이 아닌가? 어떤 기막힌 우연이 나를 그 앞으로 데려다 준다면 좋겠다. 가령 내가 사귀는 여자 친구의 집에 놀러갔는데, 그 애의 책꽂이에 그 책이 꽂혀 있다면, 그래서 나는 그녀와 결혼할 지도 모른다. 책의 부활이다.
서점에서 나오자마자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이었다. 해는 이미 졌는지 모른다. 해가 져도 얼마간은 쉽게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종각역에서 종로 3가 역까지 걸어가기로 맘먹는다. 올 때는 종로 3가 역에서 열차를 갈아타 종각역까지 왔다. 갈아타기도 귀찮고, 오랜만에 종로 거리를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종로 거리라니. 종로 거리라면, 내가 중학교 때부터 알던 거리가 아닌가? 어디를 둘러봐도, 그 거리 어느 곳이나 과거의 내가 서 있다. 나는 걸으면서 내내 담배꽁초를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종로 3가 전철역에 다다랐을 때, 내 손에는 버리지 못한 두 개의 담배꽁초가 들려 있었다. 결국 승강대에서 나는 쓰레기통을 찾았고, 담배꽁초를 버렸다. 버린 뒤에야, 내가 찾고 있는 것이 쓰레기통이 아님을 알았다. 열차에 올라 문 곁에 기대어 섰을 때, 승강대의 어떤 여자가 막 지나쳐 가는 남자의 어깨를 툭 치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반 팔의 하늘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고, 각이 진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야, 모르겠어?' 문이 닫히고,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자의 환한 얼굴과, 남자의 들썩이는 어깨를 보고 있다.
열차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후였다. 빈 어깨, 빌어먹을 화요일이 끝났다.
아, 얘기 못한 게 있다. 서점의 음반 매장에서 역시 오랜만에 테이프를 샀다. 김광진의 솔로 앨범. 몇 번인가, 케이블 TV에서 뮤직비디오를 봤는데, 노래가 끝날 때가지 다른 채널로 돌리지 못했다. 지금 그 노래를 듣고 있다. 오랜만에 -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하게 된 일이 많네 - 문장을 쓰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그녀에 대해 오래 생각했고, 그것은 내 삶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는 말과 같다.
항상 문장을 생각하고 있다. 대단한 건 아니다. 대개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러한데,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샤워를 하고 뜨거운 차를 준비하고 불을 끈 뒤에 내가 쓰고 싶은 문장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제목은 없지만, 주제는 있다. 가령, 최근의 내가 쓰고 싶었던 주제는 '회기역 승강대의 비둘기', '어두워지는 저녁의 구름' 등등 이었다. 그렇게 해서,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문장들을 머리 속에 떠올린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면, 나는 한 줄도 쓰지 않는다. 왜 인지는 모르겠다. 역시 내 성격 탓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라는, 거의 내 대부분의 문장에 나오는, 문장에 대해 뭔가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 분명 나는 혼자 걸으면서 몇 번이나 그럴지도 모르지, 라고 중얼거렸고, 그 말은 나를 아프게도 했고, 나를 체념하게 만들기도 했다.
오랜만에 정말 길게 문장을 썼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나는 꽤 길게 쓸 수 있는 놈인가 보다.
오늘은 책을 사러 가야 했다. 어제 저녁 강남역의 대형 서점에서 구하지 못했던 책을 사러 시내로 나가야 했다. 교보문고는 천장의 거울 때문에 어쩐지 번잡하고 마음이 불안해지는 탓에, 시내에 나가 책을 살 때는 영풍문고를 이용하곤 했다. 오후 다섯 시쯤, 집을 나섰다. 원래는 오전 중에 갔다오기로 생각했었는데, 화요일의 주술은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무기력함의 우물 속으로 빠트렸다. 출렁대는 늦잠과 늑장부리기. 이 도시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장소는 전철역이다. 아무리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 북적대는 것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화가 날 정도다. 출퇴근 시간이라면 차라리 낫다. 나는 도무지 출퇴근 시간이 아닌 시간대에 그렇게 많은 인간들이 전철 안에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들 모아서 당신들은 대체 이 시간에 왜 전철을 타는지 물어보고 싶다. 늑장을 부렸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원하던 책을 뽑아들고 딱히 찾는 다른 책도 없으면서 서점의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안내 데스크에 가서 예전에 품절이어서 구하지 못했던 책을 시험삼아 물어보았다. 여전히 품절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출판사에서 그 책을 출판하지 않는다는 거죠?' 여자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또 몇 년이 지난 뒤에, 나는 또 그 책을 찾으려 할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건 내 성격이다. 가끔 내가 평생 그 책을 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 이상한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다시는 출판되지 않는 책은, 어쩐지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언제까지 죽은 책들을 찾으러 다니는 바보짓을 해야 하는 걸까? 아직도 출판되고, 대형 서점을 가득 메운 저 많은 책들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어딘가 누군가의 집 서가에는 그 책이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얌전하게 꽂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 흐뭇한 일이 아닌가? 어떤 기막힌 우연이 나를 그 앞으로 데려다 준다면 좋겠다. 가령 내가 사귀는 여자 친구의 집에 놀러갔는데, 그 애의 책꽂이에 그 책이 꽂혀 있다면, 그래서 나는 그녀와 결혼할 지도 모른다. 책의 부활이다.
서점에서 나오자마자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이었다. 해는 이미 졌는지 모른다. 해가 져도 얼마간은 쉽게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종각역에서 종로 3가 역까지 걸어가기로 맘먹는다. 올 때는 종로 3가 역에서 열차를 갈아타 종각역까지 왔다. 갈아타기도 귀찮고, 오랜만에 종로 거리를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종로 거리라니. 종로 거리라면, 내가 중학교 때부터 알던 거리가 아닌가? 어디를 둘러봐도, 그 거리 어느 곳이나 과거의 내가 서 있다. 나는 걸으면서 내내 담배꽁초를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종로 3가 전철역에 다다랐을 때, 내 손에는 버리지 못한 두 개의 담배꽁초가 들려 있었다. 결국 승강대에서 나는 쓰레기통을 찾았고, 담배꽁초를 버렸다. 버린 뒤에야, 내가 찾고 있는 것이 쓰레기통이 아님을 알았다. 열차에 올라 문 곁에 기대어 섰을 때, 승강대의 어떤 여자가 막 지나쳐 가는 남자의 어깨를 툭 치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반 팔의 하늘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고, 각이 진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야, 모르겠어?' 문이 닫히고,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자의 환한 얼굴과, 남자의 들썩이는 어깨를 보고 있다.
열차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후였다. 빈 어깨, 빌어먹을 화요일이 끝났다.
아, 얘기 못한 게 있다. 서점의 음반 매장에서 역시 오랜만에 테이프를 샀다. 김광진의 솔로 앨범. 몇 번인가, 케이블 TV에서 뮤직비디오를 봤는데, 노래가 끝날 때가지 다른 채널로 돌리지 못했다. 지금 그 노래를 듣고 있다. 오랜만에 -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하게 된 일이 많네 - 문장을 쓰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그녀에 대해 오래 생각했고, 그것은 내 삶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는 말과 같다.
항상 문장을 생각하고 있다. 대단한 건 아니다. 대개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러한데,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샤워를 하고 뜨거운 차를 준비하고 불을 끈 뒤에 내가 쓰고 싶은 문장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제목은 없지만, 주제는 있다. 가령, 최근의 내가 쓰고 싶었던 주제는 '회기역 승강대의 비둘기', '어두워지는 저녁의 구름' 등등 이었다. 그렇게 해서,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문장들을 머리 속에 떠올린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면, 나는 한 줄도 쓰지 않는다. 왜 인지는 모르겠다. 역시 내 성격 탓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라는, 거의 내 대부분의 문장에 나오는, 문장에 대해 뭔가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 분명 나는 혼자 걸으면서 몇 번이나 그럴지도 모르지, 라고 중얼거렸고, 그 말은 나를 아프게도 했고, 나를 체념하게 만들기도 했다.
오랜만에 정말 길게 문장을 썼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나는 꽤 길게 쓸 수 있는 놈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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