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원근법 본문
원근법이란, 얼마나 놀라운 발견인가? 어렸을 적, 나는 친구의 풍경화를 보고 깜짝 놀랐는데, 나로선 도저히 평면의 도화지에 그릴 수 없었던, 가까운 나무와 먼 나무의 겹침을, 그는 완벽하게 자신의 도화지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어떻게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담을 수 있는가? 원근법이다. 소실점이다. 가까운 것은 크게,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마찬가지로 가까운 것은 진하게, 멀리 있는 것은 흐리게. 자, 이렇게 해서, 나는 어린 시절 방과후 미술학원을 다니던 친구의 풍경화를, 그린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사실적'인지 확인한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수록, 그것은 더욱 거짓된 그림에 불과하게 보인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원근법이란 이데올로기구나. 소실점이란 없는 거구나. 그것은 사물의 실제 양식이 아니다. 온통 거짓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내가 그린, 그 때에는 한없이 서툴게만 보였던 그 그림을 가지고 있지 않다. 멀리 있는 것이 작지도, 흐릿하지도 않으며 가까이 있는 것이 크지도, 진하지도 않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그림을 어떻게 했는가? 수업이 끝날 쯤 그림마다 점수를 매기던 선생님의 흡족하지 않은 표정에, 반대로 내 친구가 받은 과분한 칭찬에, 부끄러워져 황급히 버리지 않았던가?
나는 그렇게 해서, 진실과 멀어졌다. 원근법의 평면 속에서, 내 두께를, 폭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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