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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물고기통신 100 - 하찮음 본문

물고기통신

물고기통신 100 - 하찮음

물고기군 2004. 11. 9. 22:37

아홉수가 두개나 겹쳐서 그럴까요. 물고기통신 99호를 쓰고 나서 다음호 - 바로 이글을 쓰기까지 퍽 오랜 시간이 걸렸군요. 그동안 제게는 여러 일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단순히 여러 일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제 인생에 있어 중요한 일이라고 여길 만한 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리고 이제 돌이켜보니 그것은 그저 여러 일 중의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어떤 일도 여러 일 중의 하나가 아닌 거겠지요.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내 자신이 이제 누군가에게 뭔가를 말한 만한 인간이 못된다.’는 이상한 - 아니, 당연한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전의’ 나는 그럴만한 인간이었던 걸까요. 만일 그렇다면 저는 그만 지금 이곳에 올려져 있는 모든 글들을 지워야 했던 걸까요.
고백하자면 그러한 자괴감은 앞서 말한 ‘어떤 일’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일이 잘 되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저는 지금 깊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참 오랜만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감정을 느낍니다. 이런 감정을 느끼기에는 제가 너무 나이를 먹었다고도 느낍니다. 마치 자석에 쇳가루들이 달라붙듯이 온통 좋지 않은 감정들이 제게 달라붙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실망에도 금방 마음을 빼앗깁니다.
물론 저는 이전에도 별 대단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주목할만한 재능도 없고, 특별한 성품도 없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그때는 그러한 자신을 끌어안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도움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인간이란 결국 나이를 먹어갈수록 회한은 늘고 희망은 줄어드는 법입니다. 시간이란 그런 것입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충분히 젊지 않습니다. 막연한 희망으로 숙면을 취하기에 적어도 다섯 살은 더 먹은 것 같습니다. 희망의 약효는 뚝 떨어졌습니다. 더 큰 마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희망보다 더 큰 마비는 무엇일까요? 그런 게 있기라도 할까요?
하지만 문제는 제 자신의 ‘하찮음’에 있지 않다는 걸 알겠습니다. 제가 하찮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제가 ‘하찮은 인간이 아니고 싶어 했다는’ 데 있습니다. 하찮음을 일시적인 것이라고 여겼던 데 있습니다. 이제껏 저는 저의 ‘하찮음’을 인정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것은 저를 가리고 있는 표피적인 것 - 장막 같은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장막을 걷으면 ‘있는 그대로의 나’, 주목할만한 ‘내’가 드러날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하찮음’을 마음 깊이 두려워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척, ‘하찮음’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극복할 만큼 대단한 인간인 척 해왔던 게 진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문제는 장막을 걷어보았자 ‘하찮음’의 뒤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그 뒤의 나야말로 더욱 ‘하찮은 인간’이라는 데, 또한 있지 않습니다. ‘이제’ 희망이 없다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희망이 없다는 데 - 이건 사실이지만 -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진정으로 저의 ‘하찮음’을 받아들이고, ‘하찮음’을 고백함으로써 - 이렇게, 또 처음부터 거짓이었던 ‘희망’을 버리는 데 결코 있지 않습니다.
저의 이 말도 결국 변명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결코 저의 ‘하찮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변명을 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저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변명이 곧 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제가 했던 말들, 이곳에 올려져 있는 저의 글들은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을 겨냥한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것은 ‘진실’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진실’된 변명입니다.
진실은 제가 ‘하찮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변명을 그치지 않겠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하찮음’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끊임없이 변명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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