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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물고기통신 99 - 여자친구를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길 본문

물고기통신

물고기통신 99 - 여자친구를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길

물고기군 2004. 7. 20. 21:43

여자친구를 바래다주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참 좋아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100퍼센트의 진실은 아닙니다. 언제나 좋았던 것은 아니겠죠. 모든 연애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가장 안 좋았던 때에도 마치 고속도로처럼 한길로 쭉 뻗은 밤의 도로와 노란 가로등과 그리고 창을 열면 금새 끼쳐드는 밤의 냄새 등은 제 마음을 한껏 고무시킵니다. 저는 마음을 풀어놓습니다. 표지판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미리 차선을 바꿔놓고, 느긋하게 핸들을 붙잡고 있습니다. 때로 비가 내리기도 합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도 있죠. 공기가 너무 차가워서 창을 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쉽지만 밤의 냄새는 없습니다. 요컨대 저는 그녀와 함께 몇 개의 계절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제 인생에서 그렇게 많지 않은 소중한 시간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영원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치있다고 믿습니다. 반대로 어떤 것이 영원하지 않다면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죠. 영원한 것이 있다면 이것은 헛된 사념에 불과합니다.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돌 같은 것입니다. 마음도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물론 저는 아직도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기억들을 되새기고는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순간들도 있죠. 그것이 제 자신을 지탱시켜 주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기억이 바로 제 자신인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제게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제게서 사라졌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기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영원한 것만이 가치있다면 제가 기억하는 것은 언제나 가치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제 자신도 언제나 ‘있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기억을 통해서만 제 자신이기 때문이죠. 기억 그 자체가 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존재의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허망한 단어입니다.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의미입니다. 다만 헛된 사념과 곧 사라져버릴 기억과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실체의 그림자를 어렴풋이, 마치 어둠 속에서 곁을 스쳐지나가는 뭔가를 느끼듯이, 사라진 뒤에야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때로 저는 그것을 움켜쥐고 싶어합니다. 몇 번이고, 그것은 ‘사실’이라고 중얼거립니다. 그것은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제 자신도 확신은 없습니다. ‘사실’은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그녀를 사랑했던 일도, 또 그녀가 저를 사랑했던 일도, 세상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금방 사라져 버릴 것을 위해 자신을 소모시켰을까요? 어떻게 있지도 않는 대상을 향해 자신을 던질 수 있을까요?
그래도 그것은 있었던 일입니다. 그것은 일의 사실과 관련되어 있는 개인의 기억이나 믿음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 ‘일의 사실’은 독립적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증명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일의 사실’이 제게 지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가 ‘일의 사실’에 지향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제가 성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저의 마음이 아닙니다. 제가 그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들이 저를 이 자리로 데려왔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제가 있는 이 자리가 그 사실들을 이끌어왔습니다. 결국 저는 많은 것들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계속 계속 잊어버릴테죠. 그리고 마침내 앞서 말했듯이 제 자신도 잃어버릴 것입니다. 마음도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어떤 것도 애초에 있지 않았습니다. 살아가는 일은 물자국과 같은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와 물결을 일으킵니다. 바람이 지나가면 물결은 잡니다. 어디서 불어오든 얼마나 강하든 그것은 바람에 불과합니다.
저는 언제나 어리석은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때마다 제 손을 잡고 당신의 몸으로 이끕니다. 저는 거기에 있는 ‘사실’을 만질 수 있습니다. 모르겠어? 하는 눈빛으로 당신은 저를 쳐다봅니다. 저는 웃습니다. 하지만 정말 모르겠습니다. 웃으며, 정말 모르겠어, 하고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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