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물고기통신 89 - 공포증 본문
이것은 ‘공포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케이블 티브이를 통해 ‘공포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본 것은 아니고, 저는 공포증의 한 가지 사례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깃털’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새’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새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그녀의 소원은 딸을 데리고 외출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유명한 심리치료사를 찾게 됩니다. 이제 화면은 그 심리치료사의 치료실을 비쳐줍니다. 치료실은 마치 인문학교수의 연구실이거나 서재처럼 보입니다. 치료사는 그녀에게 모든 각오가 되어 있냐고 묻습니다.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저는 삼십 년이 넘도록 깃털을 무서워했어요.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치료사는 책상 위에 있는, 마치 크리스마스카드라도 담겨 있을 것 같은 봉투를 집어 듭니다.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세요? 그녀는 알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물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깃털입니다. 치료사는 아주 부드럽고 날렵한 깃털이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부드럽고, 날렵하고, 아주 예쁜 깃털이지요. 그 다음 그는 봉투 안에서 깃털을 꺼냅니다. 그러자 그녀는 비명을 지릅니다. 치료사와 그녀는 꽤 거리를 유지하고 앉아있었으므로, 그녀는 깃털을 그저 ‘본 것’ 뿐입니다. 화면은 잠시 그녀의 머리 속 영상을 보여주듯이, 어둠 속에서 새들이 날갯짓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푸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도 들려줍니다.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눈은 금세 벌겋게 충혈 되고 맙니다. 그리고 몸을 최대한 뒤로 빼고 있습니다. 그것은 쇼가 아닙니다. 저는 그녀가 정말로 그저 깃털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겁에 질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녀는 정말로 깃털을 무서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치료사는 깃털을 그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책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자, 여기다 올려놓겠어요.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갑자기 화면은 바뀌고 자막으로 약 10여분의 시간이 흘렀다는 정보가 나옵니다. 어때요? 이제 조금 안정이 됩니까? 그녀는 눈물을 닦습니다. 과연 그녀는 분명히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진 듯이 보입니다. 치료사는 계속 얘기합니다. 어때요? 생각보다 별로 무섭지는 않지요? 당신은 지금 당신이 여겼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무서움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당신은 깃털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깃털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깃털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당신은 깃털이 무서웠던 것이 아니라, 깃털을 보면 당신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자, 그럼 조금 더 깃털을 당신 가까이로 옮겨놓겠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금 히스테리를 부립니다. 오, 제발 그러지 말아요. 그냥 그 자리에 두세요. 하지만 치료사는 그녀의 애원을 무시합니다. 다시 화면은 바뀌고 깃털은 이제 그녀의 바로 앞에 놓여있습니다. 자막은 다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적고 있습니다. 결국 그녀는 또 몇 번의 치료사와의 실랑이 끝에 깃털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고, 깃털을 쓰다듬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삼십 여년 간 가지고 있었던 공포를 당신은 단 삼십 여분 만에 사라지게 해 주었군요, 하고 그녀는 말합니다. 다음 화면에서 그녀는 딸을 데리고 어느 공원에 있습니다.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 위에는 오리 떼가 한가로이 헤엄을 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저는 공포증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또한 모든 공포증이 위의 사례처럼, 그 대상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때로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위의 사례를 통해 새삼 알게 되었고, 말하고 싶은 사실은 아래의 두 가지입니다.
1. 우리가 여기는 것만큼 어떤 일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2.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깃털이 아니라 죽음이다.
막상 이렇게 쓰고 보니 위의 두 가지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일도(그것을 포함하는 우리의 삶 자체도) 우리가 여기는 것만큼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럴듯합니까? 하지만 제법 그럴듯해보여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이란, 그것이 무엇이든 ‘지속’의 문제가 아닌 거라고 생각됩니다. 억지로 표현하자면 죽음이란, 우리의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죽음은 대상화되지 않습니다. 죽음은 ‘어떤 일’, 우리의 ‘삶’ 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죽음’ 자체가, 우리가 여기는 것만큼 오래 지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위의 문장은 그렇게 연결되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 두려움이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사실, 그러니까 그 ‘대상없음’을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죽음’이 실제로 있듯이, ‘두려움’도 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없음이,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깃털을 두려워하지 않을 테지만, 대상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두려움 자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두려움이 죽음 자체라면, 그것은 분명 우리의 삶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표현하자면 죽음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보고 겪고는 합니다. 그것은 심야시간에 방송되는 시사프로그램의 취재들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형태의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인간의 잘못들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때도 있고, 전혀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을 때도, 과연 그것이 그런 행위를 이끌만한 것이 될 수 있는지 잘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 똑같은 크기나 형태는 아니더라도, 역시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행위들을 주위에서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제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물론 저 자신도 예외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제 자신도 돌아보면 이해할 수 없는 잘못들을 저지르고는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공포증에 걸린 그녀의 ‘깃털’에 대한 두려움을 보게 되었을 때, 아마도 저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잘못들이 간단히 용서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해도, 그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호의는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깃털’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제게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동시에 제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쁜 의미에서의 연민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올바른 출발점으로서의 연민입니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누군가를 해하고자 할 때, 제 자신도 포함해서 말이죠, 위의 두 문장을 상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깃털이 아니라 죽음이다. 그리고 어떤 죽음도 네가 그렇게 여기는 것만큼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하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해하는 마음은 쉬운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공포증에 걸린 그녀가 ‘깃털’을 만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하려고자만 한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습니다. 고작해야 삼십 여분이면 됩니다. 이건 마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의 결론 같군요.
예전에 케이블 티브이를 통해 ‘공포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본 것은 아니고, 저는 공포증의 한 가지 사례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깃털’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새’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새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그녀의 소원은 딸을 데리고 외출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유명한 심리치료사를 찾게 됩니다. 이제 화면은 그 심리치료사의 치료실을 비쳐줍니다. 치료실은 마치 인문학교수의 연구실이거나 서재처럼 보입니다. 치료사는 그녀에게 모든 각오가 되어 있냐고 묻습니다.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저는 삼십 년이 넘도록 깃털을 무서워했어요.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치료사는 책상 위에 있는, 마치 크리스마스카드라도 담겨 있을 것 같은 봉투를 집어 듭니다.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세요? 그녀는 알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물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깃털입니다. 치료사는 아주 부드럽고 날렵한 깃털이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부드럽고, 날렵하고, 아주 예쁜 깃털이지요. 그 다음 그는 봉투 안에서 깃털을 꺼냅니다. 그러자 그녀는 비명을 지릅니다. 치료사와 그녀는 꽤 거리를 유지하고 앉아있었으므로, 그녀는 깃털을 그저 ‘본 것’ 뿐입니다. 화면은 잠시 그녀의 머리 속 영상을 보여주듯이, 어둠 속에서 새들이 날갯짓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푸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도 들려줍니다.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눈은 금세 벌겋게 충혈 되고 맙니다. 그리고 몸을 최대한 뒤로 빼고 있습니다. 그것은 쇼가 아닙니다. 저는 그녀가 정말로 그저 깃털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겁에 질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녀는 정말로 깃털을 무서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치료사는 깃털을 그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책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자, 여기다 올려놓겠어요.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갑자기 화면은 바뀌고 자막으로 약 10여분의 시간이 흘렀다는 정보가 나옵니다. 어때요? 이제 조금 안정이 됩니까? 그녀는 눈물을 닦습니다. 과연 그녀는 분명히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진 듯이 보입니다. 치료사는 계속 얘기합니다. 어때요? 생각보다 별로 무섭지는 않지요? 당신은 지금 당신이 여겼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무서움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당신은 깃털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깃털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깃털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당신은 깃털이 무서웠던 것이 아니라, 깃털을 보면 당신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자, 그럼 조금 더 깃털을 당신 가까이로 옮겨놓겠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금 히스테리를 부립니다. 오, 제발 그러지 말아요. 그냥 그 자리에 두세요. 하지만 치료사는 그녀의 애원을 무시합니다. 다시 화면은 바뀌고 깃털은 이제 그녀의 바로 앞에 놓여있습니다. 자막은 다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적고 있습니다. 결국 그녀는 또 몇 번의 치료사와의 실랑이 끝에 깃털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고, 깃털을 쓰다듬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삼십 여년 간 가지고 있었던 공포를 당신은 단 삼십 여분 만에 사라지게 해 주었군요, 하고 그녀는 말합니다. 다음 화면에서 그녀는 딸을 데리고 어느 공원에 있습니다.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 위에는 오리 떼가 한가로이 헤엄을 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저는 공포증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또한 모든 공포증이 위의 사례처럼, 그 대상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때로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위의 사례를 통해 새삼 알게 되었고, 말하고 싶은 사실은 아래의 두 가지입니다.
1. 우리가 여기는 것만큼 어떤 일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2.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깃털이 아니라 죽음이다.
막상 이렇게 쓰고 보니 위의 두 가지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일도(그것을 포함하는 우리의 삶 자체도) 우리가 여기는 것만큼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럴듯합니까? 하지만 제법 그럴듯해보여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이란, 그것이 무엇이든 ‘지속’의 문제가 아닌 거라고 생각됩니다. 억지로 표현하자면 죽음이란, 우리의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죽음은 대상화되지 않습니다. 죽음은 ‘어떤 일’, 우리의 ‘삶’ 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죽음’ 자체가, 우리가 여기는 것만큼 오래 지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위의 문장은 그렇게 연결되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 두려움이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사실, 그러니까 그 ‘대상없음’을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죽음’이 실제로 있듯이, ‘두려움’도 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없음이,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깃털을 두려워하지 않을 테지만, 대상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두려움 자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두려움이 죽음 자체라면, 그것은 분명 우리의 삶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표현하자면 죽음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보고 겪고는 합니다. 그것은 심야시간에 방송되는 시사프로그램의 취재들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형태의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인간의 잘못들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때도 있고, 전혀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을 때도, 과연 그것이 그런 행위를 이끌만한 것이 될 수 있는지 잘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 똑같은 크기나 형태는 아니더라도, 역시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행위들을 주위에서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제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물론 저 자신도 예외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제 자신도 돌아보면 이해할 수 없는 잘못들을 저지르고는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공포증에 걸린 그녀의 ‘깃털’에 대한 두려움을 보게 되었을 때, 아마도 저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잘못들이 간단히 용서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해도, 그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호의는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깃털’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제게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동시에 제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쁜 의미에서의 연민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올바른 출발점으로서의 연민입니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누군가를 해하고자 할 때, 제 자신도 포함해서 말이죠, 위의 두 문장을 상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깃털이 아니라 죽음이다. 그리고 어떤 죽음도 네가 그렇게 여기는 것만큼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하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해하는 마음은 쉬운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공포증에 걸린 그녀가 ‘깃털’을 만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하려고자만 한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습니다. 고작해야 삼십 여분이면 됩니다. 이건 마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의 결론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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