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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물고기통신 42 본문

물고기통신

물고기통신 42

물고기군 2002. 3. 14. 13:54
취침시간이 늦어지면서, 역시 기상시간도 점점 더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젯밤에는, 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곱시경에는, 자명종 대용으로 맞춰놓은 라디오 소리를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겠다는 다짐을 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아홉 시 반, 라디오 소리에 벌떡 일어나 침대에 앉았습니다. 내가 왜 일어났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몸은 이미 알고 있는데, 머리는 바보같이 모르고 있습니다.

구두방에 가서 벨트 구멍을 뚫었습니다. 원래부터 헐거운 벨트라서 진작에 구멍을 몇 개 더 뚫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늘까지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게 언제부터일까? 4년이나 되었습니다.농담이 아닙니다.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벨트에는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내게 선물을 해준 건데, 허리에 대보지도 않고 서울을 떠났다가, 먼 나라의 어떤 도시에서 헐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그랬다면 교환이라도 받았을 텐데 말이죠. 생각해보면, 가죽벨트같은 선물은 참 유용한 것 같습니다. 1. 거의 매일같이, 또 그 하루에도 몇 번씩 만지게 된다. 2. 오래간다. 3.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 정도면, 연인에게 기념될 만한 선물의 요건들을 잘 갖추는 게 있는게 아닐까요? 잠시 그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그녀와 함께 있던 시절.

‘쳄발로’라는 악기가 있습니다. 엣센스 국어사전의 뜻풀이를 보면, <쳄발로(cembalo)【이탈리아어】ꃃ〖음악〗 16~18세기에 널리 쓰인 건반 악기. 피아노에서 해머로 현을 치는 것과는 달리 픽(pick)으로 현을 퉁겨 섬세하고 화려한 음색을 낸다.> 저는 어떤 새벽 라디오 음악프로에서 이 악기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요, 진행자는 피아노가 등장(18세기)하면서부터 건반악기의 제1인자의 위치를 물려줘야 했던 비운의 악기라고 하더군요. 서양음악사의 낭만파 시대,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자유분방한 감성을 표현해내는데 쳄발로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피아노의 등장을 전폭적으로 환영하게 됩니다. 그렇게해서 쳄발로는 역사의 뒷안길로 물러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진행자의 설명은, 낭만파 시대가 끝나면서부터, 쳄발로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러니까 여전히 피아노의 아성을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지만, 소박한 부활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피아노는 피아노일 뿐, 쳄발로가 아니다. 쳄발로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쳄발로 뿐이다, 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게 좋습니다. 비록 현대에 이르러서도, 건반악기하면 피아노입니다. 사람들은 쳄발로라는 악기의 이름조차 거의 모르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쳄발로는 쳄발로입니다.’ 결코 피아노가 쳄발로를 대체할 수는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 이름이 낯설어도, 만일 한 번이라도 쳄발로의 소리를 듣게 된다면, 이전에 어디선가 이미 들었던 소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바로크 시대의 유명한 바흐의 음악들에서 흔하게 쳄발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쳄발로를 생각하면 반쯤은 안타깝고, 반쯤은 흐뭇한 기분에 빠져듭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오늘 배달을 하면서 차 안에서 들었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57분 교통정보 아나운서의 코맹맹이 소리가, 내 마음을 애틋하게 합니다. 어째서일까요? 그녀의 이름은 ‘안경옥’이었습니다. 그녀는 ‘57분 교통정보의 안경옥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교통정보를 마칩니다. 잠시동안,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그녀가 원고를 탁탁 정리하고, 의자를 뒤로 조금 밀어 일어서며,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엔지니어나 피디에게 인사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습니다. 라디오 부스에, 그녀는 혼자 앉아 있었을까요? 이제 그녀는 어디로 갈까요? 그녀는 오늘 감기에 걸려 코맹맹이 소리였을까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다시 가게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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