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Mets : 서재응을 위한 구원의 손길 본문
David Waldstein, Star Ledger, 2003년 6월 22일
주심이 그의 두번째 투구시에 두번째 보크를 선언했을때, 무언가 조치가 강구되어야 했다.
한국에서 온 당시 20살의 서재응 선수는 당황했고 점점 격분하고 있었다. St. Lucie Mets의 투수코치 Bob Stanley는 그를 돕기 위해 마운드로 걸어 올라갔다. 그러나 Stanley는 한국어를 할 수 없었고, 서재응 선수는 영어를 하지 못했다. 결국, Stanley는 덕아웃과 스탠드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자신이 직접 무언의 연극을 펼치면서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그 광경은 야구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코메디 였으나, 머나먼 이국 땅에서 혼자만의 야구인생을 개척하고 있던 외국인 신출내기에게는 잊을 수 없는 창피하고 기묘한 순간이었다.
당시 스탠드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Heidi Yoon과 그녀의 남편 윤성훈씨가 있었다. 플로리다에 거주하고 있던 그들은 서재응 선수의 인생과 그 이후 투수로서의 성장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Port St. Lucie의 집에 있는 Heidi Yoon은 전화통화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그는 당시 매우 기분이 상해 있었지요. 제 기억으로는 그는 전혀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보크를 받은 것에 대해 감정이 매우 격분된 상태였어요. 그렇지만 그것을 전혀 전달할 수가 없었지요"
Heidi와 윤씨는 1998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팬으로써 서재응 선수를 처음 만났다. 그들은 Mets의 감독인 Bobby Valentine이 1997년 12월에 서선수와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투구모습을 보러 가기로 결정했다. 서선수가 필드에서 서성이고 있을때, Heidi의 여동생이 한국말로 그에게 소리를 질렀고, 이렇게 해서 그들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었다. 저녁식사에 초대된 서선수는 Heidi의 김치를 맛본 이후 그 맛을 잊을 수 없었고, 그 이후 이들의 강력한 유대가 지속되었다.
서선수가 그의 형인 서재환과 함께 플로리다에 도착한 시점은 1998년 2월로 이들과의 만남은 그로부터 1~2주 후에 이루어진다.
당시 서재환은 Mets의 마이너리그 외야수였지만, 사실 서선수의 동행에 더 가까웠다. 그들은 한국과 관련된 그 어떤 것에도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윤씨 부부와의 유대관계는 견실히 유지되었고, 특히 그의 형 서재환이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서선수 지원의 토대가 되었다.
1999년 서선수가 팔꿈치 수술을 받게되고 그 이후 길고도 암울한 재활의 과정이 시작된 이후에는 윤씨 부부는 서선수에게 더욱 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윤씨 부부의 사랑과 지원 - 특히 Heidi의 김치 -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엄청난 기대와 희망을 가진 메이저 투수로 진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5승 2패와 2.66의 방어율로, 신인투수 서재응은 올시즌 Mets의 최고투수로 활약하고 있다.
Daniel Kim을 통해 서선수는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저의 재활과정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2/3정도라고 느낍니다. 그들의 사랑과 후원이 없었다면, 저는 조그만 호텔방에 혼자 처박혀 절망과 비탄속에 세월을 보냈을 거에요 . 그들의 도움을 통해 어려운 시기를 이겨냈어요. "
서선수와 그의 형이 윤씨 부부를 처음 만났던 1998년의 힘들었던 그 시기의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당시 그들은 마냥 행복하고 웃는 풋내기들이었으며, 서선수가 운전을 할줄 몰랐기 때문에 Heidi나 윤씨가 그들을 태우러 올때까지 시합용 배낭을 짊어지고 스프링 트레이닝 경기장을 서성이며 기다리곤 했다.
"그들이 운전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어요. 이점은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이지요. 우리은 결국 서선수에게 운전을 가르쳐야만 했어요"라고 Heidi는 웃으면서 말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씨 부부는 자동차외에도 숙식 특히 가장 중요한 머나먼 이국에서의 가족과 같은 편안함까지도 제공하게 되었다. 서재응과 그의 형은 처음에 St. Lucie Holiday Inn에 투숙하였으나, 며칠 후에는 윤씨네 부부집으로 거처를 옮기고자 하였다. 메츠 구단에서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였고, 구단이 하숙비를 대주는 것을 제안하였다.
윤씨 부부는 어린 아들이 있었고, Heidi는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몇번의 저녁식사를 가지면서, 그 쾌할하고 명랑한 어린 아들이 엄마를 이겼다. 이리하여 서씨 형제는 입주를 하였고, 이때부터 서재응은 김치를 무려 배럴단위로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한달이 지나, Heidi는 메츠 구단에 천달러를 청구하였다. 메츠 구단이 이에 대해 질문을 하자, 사실은 천오백불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김치의 힘으로 -- Stanley는 매 경기 전에 서선수에게 "오늘은 김치 먹었나?"하고 항상 묻곤 했다 -- 서선수는 첫해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고 야구 관계자들 사이에서 스타로 떠올랐다.
98년 가을 그는 플로리다 주립대학 챔피언쉽 경기에서 Tampa Yankees를 상대로 한 8이닝 노히터를 포함하여 플레이오프에서 두번 연속 shutout을 통해 Single A - St. Luice Mets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St. Luice의 감독이었던 Howie Frieling은 서선수의 압도적인 활약에 대해 이렇게 술회한다. "어른대 소년의 시합 같았어요. 대적 상대가 되지 않았어요."
3개월이 지나, 지구의 다른 모퉁이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태국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군입대를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서선수는 2승 무패를 기록하였고 한국팀은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제 서선수는 38선 근처에서 무장을 한채 2년 6개월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서선수는 1년 이내에 Shea Stadium에 입성할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 다시 플로리다로 돌아왔다.
"그 경기 후 우리 모두는 펄쩍 펄쩍 뛰면서 외쳤지요. '군대 면제다' '군대 면제다'" 라고 서선수는 말한다.
그러나 시련의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몇달이 지나, 방콕에서의 열광은 통증, 수술, 고립 그리고 절망으로 이어졌다.
1999년 5월 27일, 그의 22번째 생일 3일 후, 서선수는 오른쪽 팔굼치에 Tommy John 수술을 받게 되었고, 재활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그 기간 동안에 서선수는 매우 침울해했고, 이는 서씨 가족뿐 아니라 메츠 구단까지도 염려할 수준이었다.
그의 커리어는 위기에 놓여 있었고, 메츠 구단이 그의 형을 방출하여 형이 한국으로 떠나간 이후에는 이국땅에 혼자 남게 된 신세가 되었다. 1999년 후반기와 2000년 내내 서선수는 메츠의 스프링트레이닝 경기장의 텅빈 마이너리그 구장에서 홀로 재활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는 향수병에 걸려 있었고, 외로움과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는 그의 문제에 대해 말을 걸어 볼려고 했어요. 마침내 제 남편은 그에게 술까지 먹여 가면서 노력했지요. 그러나 서선수는 매우 침울해 했고, 좀체 말문을 열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가 말문을 열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했어요."라고 Heidi는 말한다.
마침내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고, 서선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안, 절망 그리고 외루움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그는 또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재활과정의 일부였다. 팔꿈치 수술을 받게 되는 모든 투수들은 이러한 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국에서의 고통스런 그런 과정은 아니다.
"서선수는 원래 항상 쾌활했어요. 그러나 그 기간동안에는 전혀 미소를 찾아 볼수가 없었지요."라고 Heidi는 말한다.
서선수가 2001년에 다시 마이너로 돌아와 부진한 성적을 내면서 그는 더 큰 시련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이를 고민하던 메츠 구단은 윤씨 부부에게 Norfork로 가서 Triple A에 있는 서선수를 만나줄것을 부탁하였다. 그들과 만나고 난 후 서선수는 즉각 밝아졌다. 시즌이 끝나갈 무렵, 그는 다시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였고, 특히 playoff까지 이어졌다.
18개월이 지나 "김치의 힘"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Heidi와 윤성훈씨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은 마이애미의 Pro Player Stadium에 서선수가 그의 인생의 게임에서 투구하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으며, 가운데 손가락 손톱 부상으로 게임에서 물러나가 까지 6 2/3이닝 동안 그의 일안타 shutout 게임을... 경기가 끝난 후, 그들은 근처의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했고, 과거의 일들과 현재 한국교민들 지역인 Queens의 Flushing에서 서선수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있잖아요, 그는 이곳 플로리다를 정말 사랑해요. 그가 뭐라고 한지 아세요? 그는 '아, 집에 온 기분이다.'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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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기사 원문>
Mets: Seo aided by an extended Korean family
Sunday, June 22, 2003
BY DAVID WALDSTEIN
Star-Ledger Staff
When the umpire yelled "balk" for the second time on two pitches, something had to be done.
Jae Weong Seo, the Mets' South Korean pitcher, just 20 at the time, was confused and starting to grow angry. St. Lucie Mets pitching coach Bob Stanley walked to the mound to help him. But Stanley can't speak Korean and Seo could not speak English, so Stanley had to act it out for him, pantomiming a balk while people in both dugouts and the stands watched the unusual display.
It was a scene right out of a baseball comedy, but it was also a bit embarrassing for Seo, another awkward moment for a foreign kid trying to find his way in a strange land.
Two of the people in the stands that day were Heidi Yoon and her husband, Sung Hun Yoon, a South Korean couple living in Florida who would come to play a pivotal role in Seo's life and his development as a pitcher.
"He was very upset," Heidi Yoon said from her home in Port St. Lucie, Fla. "I remember he kind of got very mad about that because he didn't think he was doing anything wrong. But he couldn't explain it."
Heidi and Sung Hun first met Jae Weong (pronounced jay e-ung) as fans at spring training in 1998. They heard Mets manager Bobby Valentine had signed Seo in December 1997 and decided to go see him pitch. As Seo walked from one field to another, Heidi's sister called out to him in Korean, and the relationship began. It started with a dinner invitation, and once Seo tasted Heidi's kim chee -- a spicy Korean cabbage dish -- a bond was forged.
It was only a week or two earlier, in February 1998, that Seo had arrived in Florida with his older brother, Jae Hwan Seo. Jae Hwan was brought in as a minor-league outfielder for the Mets, but was really more of a companion for Jae Weong. The two were desperate for some connection to their country, so a friendship was struck with the Yoons that, after Jae Hwan returned to Korea, would become Jae Weong's foundation of support.
The Yoons became even more vital to Seo after he had major elbow surgery in 1999 and had to undergo the long, depressing rehabilitation process.
Had it not been for the Yoons' love and support -- and particularly Heidi's kim chee -- then maybe Seo wouldn't have made it to the major leagues with as much promise as he has. With a 5-2 record and 2.66 ERA, the rookie has been the Mets' best pitcher this season.
"I honestly feel that they did about two-thirds of my rehab," Seo said through a friend, Daniel Kim. "If they had not been there with their love and support, I would have been all by myself in a small hotel room, even more depressed and miserable. They helped me get through the tough times."
Back in those heady days of '98, when the Seos first met the Yoons, Jae Weong and his brother were just two happy, smiling kids, walking around the spring training complex with matching backpacks, waiting for a ride from Heidi or Sung Hun because the Seos didn't know how to drive.
"I couldn't believe they didn't drive," Heidi said, laughing. "It's different in Korea than it is here. We eventually had to teach (Jae) how to drive."
Soon, the Yoons were not only providing rides, they were providing a roof, a bed, and most important, a family away from Seo's real family back in South Korea. The Seos started out in the St. Lucie Holiday Inn, but after a few nights they wanted to move in with the Yoons. The Mets thought it was a good idea and asked the Yoons if they would consider it while the team picked up the tab for room and board.
The Yoons had a baby boy, and Heidi was skeptical. But after a few more dinners, the affable boys won her over. The Seos moved in and Jae Weong began to consume kim chee by the barrel.
After the first month, Heidi gave the Mets a bill for $1,000. When the Mets asked her about it, they were told it was probably closer to $1,500. But fortified on kim chee -- Stanley would always ask Seo before every start, "Did you eat your kim chee?" -- Seo did remarkable things that first year and his star soared among the baseball cognoscente.
He pitched the Single-A St. Lucie Mets to a title in the fall 1998 with two consecutive shutouts in the playoffs, including a no-hitter through eight innings against the Tampa Yankees in the Florida State League championship game.
"It was a man against boys," then St. Lucie manager Howie Frieling said of Seo's dominating performance. "It was not even close."
Three months later, Seo was doing the same thing on the other side of the globe. With the threat of having to join the army unless his team won the gold medal at the Asian Games in Thailand, Seo went 2-0 as the South Korean team went undefeated to win the gold. Seo would not have to spend 2 1/2 years humping a pack along the 38th parallel. He could return to Florida to resume a career that was destined to land him at Shea Stadium, possibly within a year.
"After the game, we were jumping up and yelling, 'No army. No army,'" Seo said.
But Seo had no idea how hard things were about to get for him. Within months, the jubilant celebration in Bangkok quickly disintegrated into sharp pain, surgery, isolation and depression.
On May 27, 1999, three days after his 22nd birthday, Seo had Tommy John surgery on his right pitching elbow and would begin a rehabilitation process that wasn't fully complete until this past spring. During that period, Seo became so low that not only was Heidi and her family concerned, so were the Mets.
His career was in jeopardy, his brother had gone back to South Korea after the Mets released him, and Jae Weong was practically alone in a foreign land. For the second half of 1999 and all of 2000, Seo's days were consumed with rehabbing, mostly by himself, in the empty minor-league side of the Mets' spring training complex. He was homesick, lonely and a little scared.
"We couldn't get him to talk about it," Heidi said. "Finally, my husband tried to get him drunk, just to see if he would talk. Jae was so unhappy, and he wouldn't talk about it. We had to find a way to make him talk."
The old-school medicine worked and Seo did talk -- about his fears, his frustrations and his loneliness. He cried a few tears as well. It was all part of the rehabilitation process. All pitchers who have major elbow surgery go through it, but few go through it in a land where virtually no one speaks your language.
"Jae was always the happy kid," Heidi said. "But during that time, there was no smile."
Seo went through more tough times when he came back in 2001, struggling in the minors. Again, the Mets were worried and asked if the Yoons could go to Norfolk, Va., to check on him at Triple A. They did, and Seo immediately brightened up. By the end of the season, he was dealing again, especially in the playoffs.
Eighteen months later, Heidi, Sung Hun and their extended family were in the stands at Pro Player Stadium in Miami with signs reading "Kim Chee Power," watching Seo pitch the game of his life, throwing a one-hit shutout through 6 2/3 innings until a split fingernail forced him from the game. Afterward, they went out to dinner at a nearby Korean restaurant and talked about the old days and about how Seo enjoys living in Flushing, Queens in the midst of a large Korean community.
"You know, he really loves it here Florida," Heidi said. "You know what he said? He said, 'Ahhh, I'm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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