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또 다시 스머프 마을 본문
분명히 나는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아가고 있다는 말에 '발전적인' 의미는 전혀 없다. 단적인 예로, 앞서 말했다시피 최근의 나는 무지 바빠졌는데, 나는 이 일로 아주 의기소침해졌다. 예전에는 분명 아무리 바쁜 상황이라 해도, 그래서 세상 사람 모두 바쁘다 해도, 나 혼자만은 바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내가 대단히 특별한 존재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럭저럭 나는 평범하게 살아왔다. 나를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를 뚜렷이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평범한' 삶이란 것이 내게 너무 어려워져 버렸다. 여전히 어린애처럼 구는 건지도 모른다. 피터팬 증후군 같은 것일지도.
하루에 두 번 강을 건넌다. 어느 날 문득 하루에 두 번 강을 건넌다는 사실이 내게 얼마나 행운인지 알게 되었다. 더욱 행운인 것은, 내가 지상으로 달리는 국철을 탄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강을 건너는 것을 기점으로 해서, 나의 열차는 지상과 지하로 나뉘어진다. 학교로 갈 때는 압구정동 역을 지나서 열차는 지상으로 올라가 동호대교를 건넌다. 강을 건너자마자 옥수 역에서 국철로 갈아탄다. 계속 지상이다. 집으로 갈 때는 그 반대, 회기 역에서 옥수 역까지가 지상, 동호대교를 건너자마자 다시 열차는 지하로 들어가고 계속 지하다. 그게 묘하게도 시간상으로 딱 절반이다.
나는 열차의 문 곁에 서서 책을 읽는다. 그러다 열차가 지상으로 올라서면, 그래서 동호대교 위를 달릴 때면 책을 덮고 창 밖을 바라본다. 강을 건너는 열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근사하다.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다. 멀리 있는 구름이라든지, 멀리 있는 집들, 그 사이로 우뚝 솟은 대형 입간판, 멋지게 커브를 도는 강변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 그리고 멀리 흐르는 강. 가끔은 시선을 내려 바로 다리 밑을 흘러가는 강물을 유심히 바라보기도 한다. 시간을 잘 맞추면 물결 위로 잘게 부서지는 햇빛이라든지, 유난히 높게 출렁거려서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강의 흐름을 볼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각은 대개 어두워진 뒤다. 옥수 역의 3호선 승강대 제일 앞쪽으로 나아간다. 그곳에서는 소실점으로 모아지는 철길과, 나란히 놓인 도로를 건너는 자동차들의 긴 행렬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강 건너편 아파트의 불빛들과 붉은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는 검은 강물을 볼 수 있다. 열차를 타고 나는 또 창 밖을 내다본다. 실내가 환하고 바깥은 어둡기 때문에, 얼굴을 바짝 창문에 들이대고 두 손바닥으로 눈가로 흘러드는 빛을 가려야만 풍경을 잘 볼 수 있다. 어두워진 후의 도시 또한 근사하다. 가끔 어두운 하늘보다 더 어두운 구름들을 보기도 한다. 그 반대로 유난히 하얘서 보이는 구름도 있다. 나는 어째서 구름들이 어떤 날은 너무 어두워서 보이고, 어떤 날은 너무 하얘서 보이는지 알지 못한다. 실제로 열차가 강을 건너는 시간은 약 1분 정도나 될까? 그 1분, 강의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 또 강의 저쪽 편에서 이쪽 편으로 열차가 건너는 그 1분이 내게 얼마나 행운인지, 그래서 그 1분 동안 나는 얼마나 편안히 나에게 돌아올 수 있는지, 하루 내내 나는 어떻게 '내'가 아니었는지 알게 된다.
사실 내가 하려는 말은 '다른 세계'에 관한 것이다. 술자리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나온 문맥도 기억할 수 없고, 과연 그 상황에 적합한 말이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하여튼 요즘의 나는 '다른 세계'라는 말을 자주 떠올린다. 어쩌면 지금껏 주욱 '다른 세계'는 나의 뻔한 테마였는지도 모른다. 가령 '스머프 마을'이라든지, '옛날 노래 나라'라든지, '동작대교의 다리 건너편의 세계', 재수시절 학원의 '국기게양대', 늑대인간의 귀환에서의 '달이 입구가 되어 갈 수 있는 세계' 등등. 하지만 그 모든 이미지들을 한 줄로 꿰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말로 아주 막연한 이미지다. 나는 아주 막연하게, '이곳이 아닌 세계'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문예반에 있었고, 문집에 서평을 쓴 적이 있다. (서평이라는 말보다 독후감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다. 분명 꽤 감동을 받았던 모양으로, 나는 단숨에 써내려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글에 스스로도 꽤 흡족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단편집의 모든 글들이 나를 매료시켰지만, 그 중에서 특히 '우주여행'과 '육교 위에서' 그리고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는 더욱 그러했다. (아직도 제목을 외우고 있다니, 나도 놀랄 지경이다.) '우주여행'에서 처음으로 지섭과 윤호가 나온다. 지섭은 윤호에게 달세계에 대해서 말해준다. 지섭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너무나 끔직하다.'고 말한다. '지상에서는 시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특히 '약속과 맹세는 깨어'진다는 부분이 좋았다.) '육교 위에서'는 신애의 동생과 그 친구의 얘기다. '모두 한편이 돼가고 있다.'고 친구는 동생에게 말한다. 그리고 결국 친구도 '한편'이 된다.
고등학교 시절이라면 정말 오래 전 일이다. 그 때 나는 고작 열 일곱 열 여덟이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다. 십 년이 흐르고 난 뒤에야, '약속과 맹세가 깨어지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그리고 '한편'이 된다는 게 뭔지 알게 되었다. 어리석게도.
그래서 다시 '스머프 마을'이고 다시 '다른 세계'다. 나는 정말 잘 모르겠다. 상상력이 부족한 탓인지도, 어리석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느끼는 거북함은 이런 것인데, 결국 '다른 세계'란 것은 언제나 '다른 세계'가 아닌가라는 점이다. 그것은 언제나 '이 세계'를 상정해야 성립하는 개념이 아닌가 말이다. 이 세계가 변하든지, 아니면 내가 변하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다. 그래봤자, 여전히 다른 세계는 '다른 세계'인데.
열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그 1분의 세계, 나는 어쩌면 그것이 '다른 세계'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분명히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 1분을 다시 30초로 10초로 단축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게 나 때문인지, 이 세계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서도 '이 세계'에서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10초가 다시 1초로 나중에는 영원히 제로가 되었을 때, 그 때에 나는 뭐라고 말하겠는가? 지금 나는 그것이 몹시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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