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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군 2001. 8. 9. 00:17

편의점에서 담배 세 갑과 1.5리터 짜리 다이어트 콜라 페트 병을 샀다. 오천 사백 원이 나왔다. 냉동실의 얼음판을 꺼내 안에 있는 얼음을 빼내고 새물을 채워서 도로 넣었다. 집 안에 있는 컵 중 가장 큰 컵을 꺼내 얼음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콜라를 붓는다. 급하게 부은 탓인지 거품이 많이 올라서 잠시 거품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콜라와 얼음으로 가득 찬 컵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마루의 불을 끄고, 방안의 불도 끈다. 시디 플레이어에 김건모 5집 시디를 집어넣었다. 지금은 세 번째 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또 김건모 5집이다. 언제 노래였지. 1998년 여름이다. 그 해 여름 나는 장지동의 운전면허 학원을 다녔다. 집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오고 가는 내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녔다. 신발 밑창이 녹아서 쩍쩍 달라붙을 것 같은 그 해 여름의 후끈한 아스팔트 지열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유별나게 더운 여름이었다. 실제로 그만큼 더웠는지, 아니면 당시에 내가 처한 상황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 김건모 5집이다.

컵 아래로 벌써 흥건하게 물이 괸다. 얼음도 많이 녹았다. 지금은 다섯 번째 노래, '당신만이'가 흐르고 있다.

책상 위에는, 키보드와 마우스, 마우스 패드, 담배와 라이터, 재떨이, 콜라가 담긴 컵, 스탠드, 그리고 카버와 모디아노, 하루키의 소설집 몇 권이 놓여있다.

왜 소설을 쓰지? 실제로 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있다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해도,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질문이다. 연애얘기를 해보자. 내가 누군가와 사귀고 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내게, 왜 그녀를 좋아하지, 라고 묻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질문은 기어코 생겨난다. 그 질문은 때로 불쾌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그 질문이 생겨났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더 이상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질문 없는 확신은 너무나 가볍다. 확신은 질문을 통과한 뒤에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질문을 통과하기. 이것은 그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답이 필요할 뿐이지, 그 답의 진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근에 나는 누군가에게, '나는 이벤트주의자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사람들을 모아 떠들썩하게 일을 벌인다는 의미의 이벤트는 아니다. 말 그대로 나는 언제나 '사건'을 원한다. 계기를 원하고, 뚜렷한 시작과 더 갈 데 없는 끝을 원한다. 그러니까, 나는 '자, 이제 시작이다'라는 느낌을 좋아한다. 그리고 거기에 몰두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내게는 지속이란 게 없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내게 무의미한 것이다. 영원한 사건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런 나를 두고, 변덕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소설쓰기는 이벤트로서의 성격을 거의 다 갖추고 있다. 소설쓰기를 준비할 때의 설레임과 기대, 소설쓰기에의 몰두, 다 쓰고 난 뒤의 퇴고, 완전히 지쳐빠진 뒤의 끝. 그리고 성패. 한 편의 소설을 끝내고 난 뒤의 얼마간의 게으름과 휴식. 그리고 다시 소설쓰기를 준비.

중요한 건, 그 각 단계를, 충분히 즐기는 것이다. 어떤 소설을 썼는가, 그것이 소설로써 충분히 완성되었는가,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발전했는가, 물론 이런 것들도 중요하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입장은 다르다. 만일 내가 소설을 쓰는 시간을 충분히 즐거워하지 못한다면, 내가 소설을 써야 할 이유 같은 게 어디 있겠는가? 내 삶을 소설쓰기가 아닌 다른 걸로 채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도대체 아무도 나에게 소설을 쓰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내 소설을 간절히 기다리는 독자도 없다. 도대체 내 소설이 이 세상에 얼마간이라도 가치 있는 공헌을 할 거라는 확신도 없다. 만일, 아무도 읽지 않고, 읽은 사람에게도 단지 시간낭비일 뿐인 그런 소설을 쓰게 된다면, 내가 그 소설을 쓴 시간들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열 다섯 번째, 마지막 노래다. 노래제목은 모르겠다.

담배 세 갑과, 차가운 콜라, 어두운 방안과, 환한 모니터, 김건모 5집, 자정의 시각, 내가 소설을 쓰기 위해 준비한 것들이다. 새소설이다. 너무 많이 게을렀다. 지금 이 시간이 즐겁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려는 것이다. 이제 막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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