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울음 본문
사람들은 곧잘 운다. 운다는 행위 자체는,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특별하지도 않다. 그것은 우리가 재채기를 하거나, 딸꾹질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하지만 자연스럽다는 점을 제외하면, 운다는 행위는 일반적인 생리현상과 다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감정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어진다. 아픔이나 슬픔의 감정이다. 그러나 운다는 행위 자체를 깊숙이 따지고 들어가자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가령, 먼저 눈물을 흘리는 행위를 운다는 행위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향의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눈물을 일종의 울음의 전단계 정도로 바라보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먼저 눈물을 흘리고, 다음에 울음을 운다. 눈물만 흘리고, 울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울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 이것은 순전한 단계의 문제다. 두 번째는, 울음으로서의 눈물이 있고, 울음이 아닌 것으로서의 눈물이 있다. 울음이 아닌 것으로서의 눈물은, 티끌이 들어가서 흘리는 눈물부터 시작해서 아마도 심하게 꼬집혔을 때 찔금 흘리는 눈물까지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의미를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위의 두 가지 관점은 전반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행위를 운다는 행위에 포함시키는 관점이다.
전혀 다른 관점은, 눈물을 흘리는 행위와 운다는 행위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전혀 다른 관점일 수 있는 것은, 눈물을 흘리는 것과 우는 것이, 전혀 다른 원인에 의해 촉발되고 전혀 다른 목적으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눈물과 울음을 구분하는 이러한 관점을 통해 우리는 울음이라는 행위를 더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외형적으로 보면 눈물이 눈의 행위라면, 울음은 입의 행위이다. 이것을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눈물이 눈의 행위라는 것은, 눈물이 눈에서 흘러내린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상대방 또한 눈으로써 그것을 보아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알다시피 시선이란 제한적이다. 만일 그가 아주 가깝게 있다해도 뒤돌아 서있다면 내 눈물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 반면 울음은 그렇지 않다. 울음은 그를 뒤돌아보게 만들 수 있다. 울음이 입의 행위라는 것은, 그것이 소리를 통해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즉, 눈물이 자기만족적인 행위라면 울음은 자기표현적인 수단이다. 이것이, 눈물과 울음을 구분하는 관점이다. 아이의 울음이 이러한 관점의 단적인 예가 된다. 아이는 울음으로써 자신을 표현한다. 아이에게 울음은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눈물이 생리적인 현상이라면, 울음은 사회적인 현상이다. 울음은 타자에게 능동적으로 전달하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울음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타자에게 무언가를 호소한다. 울음은 내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가 울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울음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부질없는 지를 말이다. 어른의 세계에서 울음은 어리석은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