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베스트 음성사서함 본문
여자는, 종종 내 삐삐 인사말을 직접 바꿔주곤 했다. 분명 당시엔 그러한 일이 유행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비밀번호를 나누고, 인사말을 대신 녹음해주고, 가끔 상대방의 음성사서함도 조심스레 확인한다. 자신이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지 않나 라고 의심해서는 아니다. 그냥 서로의 가장 비밀스러운 개인정보까지 나누고 있다는, 소꿉장난 같은 친밀함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얼마간 각자의 시간을 가져보자고 여자에게 요구하고, 며칠 뒤, 내 삐삐 인사말은 김건모의 '사랑이 떠나가네'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난 여자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음성사서함을 확인하는 일은, 항상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커튼을 열고 창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난 그날의 날씨를 알 수 있었는데, 음성사서함에 그녀가 남긴 '오늘의 날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빨리 일어나,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 일어나면 우리 집에 연락하구.' 난, 그러나 게으름을 피우며, 이불 위를 뒹굴뒹굴한다. 내 음성사서함에는, 몇 개의 베스트 녹음이 항상 오래 저장되어 있었는데, 첫 번째는 그녀를 막 만나기 시작해서 며칠 뒤 처음으로 그녀가 직접 녹음한 음성이었다. 별 내용은 아니다. 가령, '오늘 좀 늦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 등등. 언젠가, 여자는 이런 내용을 녹음했다. '오늘은 내 생애 세 번째로 기쁜 날이에요.' 그 날 나는 다음 주에 그녀와 동물원을 함께 가기로 약속했었다. 생각해보면, 그 약속이 그녀와의 공식적인 첫 데이트 약속이었던 것 같다.
난, 가끔 책상에 앉아 전화기를 통해 나의 베스트 음성사서함을, 몇 번이고 반복해 듣곤 했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야만 했다.
'이봐, 정말이야, 이상하게도 분명 진동을 느끼고 황급히 주머니에서 삐삐를 꺼내보면, 아무런 메시지도 없는 거야. 그런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난다구'
그건 또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그랬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도, 난 몇 번이나 그녀의 삐삐번호를 눌렀다. 내 전화번호를 찍거나, 음성사서함을 남길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삐삐인사말이 듣고 싶었을 뿐이다. 아, 이번에 이 노래로 바뀌었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그녀의 삐삐 인사말에 녹음된 노래는, 전람회의 '새'였다. 난 다음날로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 전람회의 CD를 샀다. 아주 오랫동안, 몇 번이고, 노래를 반복해 들으면서, 꼭 그만큼 가사를 읽고 또 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삐삐는 끊겼고, 난 지금 그녀의 번호를 잊어버렸다.
삐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제 흔치 않다.
015-8379-6279, 이제는 끊어버린 내 삐삐번호, 그녀는 내 번호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문득, 전화를 걸어보고 싶다. 그래서, 아직도 내 베스트 음성사서함이 저장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얼마간 각자의 시간을 가져보자고 여자에게 요구하고, 며칠 뒤, 내 삐삐 인사말은 김건모의 '사랑이 떠나가네'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난 여자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음성사서함을 확인하는 일은, 항상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커튼을 열고 창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난 그날의 날씨를 알 수 있었는데, 음성사서함에 그녀가 남긴 '오늘의 날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빨리 일어나,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 일어나면 우리 집에 연락하구.' 난, 그러나 게으름을 피우며, 이불 위를 뒹굴뒹굴한다. 내 음성사서함에는, 몇 개의 베스트 녹음이 항상 오래 저장되어 있었는데, 첫 번째는 그녀를 막 만나기 시작해서 며칠 뒤 처음으로 그녀가 직접 녹음한 음성이었다. 별 내용은 아니다. 가령, '오늘 좀 늦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 등등. 언젠가, 여자는 이런 내용을 녹음했다. '오늘은 내 생애 세 번째로 기쁜 날이에요.' 그 날 나는 다음 주에 그녀와 동물원을 함께 가기로 약속했었다. 생각해보면, 그 약속이 그녀와의 공식적인 첫 데이트 약속이었던 것 같다.
난, 가끔 책상에 앉아 전화기를 통해 나의 베스트 음성사서함을, 몇 번이고 반복해 듣곤 했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야만 했다.
'이봐, 정말이야, 이상하게도 분명 진동을 느끼고 황급히 주머니에서 삐삐를 꺼내보면, 아무런 메시지도 없는 거야. 그런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난다구'
그건 또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그랬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도, 난 몇 번이나 그녀의 삐삐번호를 눌렀다. 내 전화번호를 찍거나, 음성사서함을 남길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삐삐인사말이 듣고 싶었을 뿐이다. 아, 이번에 이 노래로 바뀌었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그녀의 삐삐 인사말에 녹음된 노래는, 전람회의 '새'였다. 난 다음날로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 전람회의 CD를 샀다. 아주 오랫동안, 몇 번이고, 노래를 반복해 들으면서, 꼭 그만큼 가사를 읽고 또 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삐삐는 끊겼고, 난 지금 그녀의 번호를 잊어버렸다.
삐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제 흔치 않다.
015-8379-6279, 이제는 끊어버린 내 삐삐번호, 그녀는 내 번호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문득, 전화를 걸어보고 싶다. 그래서, 아직도 내 베스트 음성사서함이 저장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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