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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나는 이 말을 아주 슬픈 마음으로 쓰고 있다.` 본문

단상

`나는 이 말을 아주 슬픈 마음으로 쓰고 있다.`

물고기군 2001. 6. 8. 00:21

'나는 이 말을 아주 슬픈 마음으로 쓰고 있다.' 라는 문장이 있다. 이건 오늘 내가 누군가의 홈페이지에서 읽은 문장이다. 그 사람은, 그 글을 '나누고 싶은 글'이란 곳에 올렸고, 그렇게 해서 나는 나눔을 받은 셈이다. 위의 문장의 주인공을 나는 이미 몇번이나 말했듯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났다. 그 때의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이상한 일이지만, 그 때의 나를 떠올리면 육교가 생각난다. 학교는 육교 너머에 있었다. 나는 아침마다 육교를 건너 학교를 갔고, 저녁이면 육교를 건너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육교는 아직도 있다. 같은 방향의 친구가 있어서 저녁에는 함께 육교를 건넜는데, 나는 그 친구에게 반복해서 '절에 들어갈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난다. 분명 절에 들어간다는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다. 가령,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그 시절은 그랬다. '이 곳'이 싫다고 생각했다. 집도 싫었고, 학교도 싫었다. 나는 이 세계와 잘 어울리지 못했다. 최근에 나는 우연히 고등학교 때의 친구를 만나게 되어 길게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내게 '너는 스타일이 특이했어.'라고 말했다. 그 친구가 기억하는 나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 괜히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있던 녀석이었다. 그건 내게 조금 놀라웠다. 나는 내가 굉장히 평범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냥 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육교를 같이 건너다니던 친구와는 집도 가까워서 밤이 늦은 시각에도 놀이터에서 만나곤 했다. 우산처럼 생겨서 빙글빙글 돌리게 만든 놀이기구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괜히 발로 땅을 지쳐 놀이기구를 돌리면서 말이다. 그 친구는 대학에 떨어진 뒤 반 년 뒤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에서 편지가 한 통 왔는데, 편지지 색깔이 어째서인지 핑크 색이었다.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별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고, 조금 귀찮았을 뿐이다.

나는 특히 그 작가의 작품 중에 '우주여행'을 좋아했다. '우주여행'은 아마 내가 처음으로 필사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고등학교 때 썼던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윤호였다. 주인공 이름이 똑같으니까, 쓰면서도 내내 내가 굉장히 멋진 문장을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주여행의 한 대목은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는데, 그건 이런 것이다.

'나는 네가 왜 대학에 떨어졌는지 알고 있어'

'왜?'

'우주인이 네 답안지를 훔쳐갔어.'

'우주인이 왜 내 답안지를 훔쳐갔지?'

'우주인은 내가 대학에 떨어질 줄 알고 있었어.'

여자 주인공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은희였나? 작가는 그녀를 '깨끗한 여자'라고 묘사했다. 깨끗한 여자. 어쩐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을 것 같다고 멋대로 상상했다. 

내가 위 문장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부끄럽게도 대학 1학년 때 어떤 여자에게 똑같이 써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학원을 다녔었고, 대학 1학년 때 우연히 만나 사귀게 되었다.

괜한 얘기다. 다시 처음의 문장으로 돌아가야 겠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슬픈 마음으로 쓰고 있다.'

물론 나는 이제 고등학생이 아니다. 그러니까, 위의 문장을 쓴 작가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쓴 작품에 대해서도 고등학교 때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가령 주인공 이름을 똑같이 흉내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 작가처럼 쓸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처럼 위대한 작품이거나, 그처럼 아름다운 작품을 쓸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의미에서도 나는 쓸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것은 나를 안타깝게 하거나, 부끄럽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한데 말이다.

하지만 오늘, 위의 문장은 나를 그런 기분에 빠지게 만들었다. 정확히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는 모르겠다. 문득, 나는 미국에서 핑크색 편지지에 편지를 썼던 그 친구에게 답장을 썼어야 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는 후회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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