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물고기통신 75 본문
나는 때때로 가을날 휴일 오후의 공원을 떠올린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투명하고, 풀 냄새가 나는 공원이다. 잔디밭이 눈 닿는 데까지 넓게 펼쳐져 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희미하게 열차소리도 들린다.
나무 그늘이 비껴 간 벤치에 앉아 여자의 어깨를 감싸안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그녀의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과, 발 밑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에 관한 얘기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땐 잘 모른다. 잘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엔 나 혼자 그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대부분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내 옆에 앉아서 담배를 나눠 피기도 한다. 뭐라해도 모두가 행복한 가을날의 공원인 것이다.
이제 그 시절의 일을 기억할 때면 그 공원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왜 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날 그녀에게 얘기했던 것처럼 피크닉을 나온 것 같은 공원이다. 당연하잖아, 우린 정말 피크닉을 나왔다고, 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와 첫 데이트 때 칵테일을 마셨던 카페가 술집으로 바뀐 것처럼, 2학기 내내 강의가 끝나면 찾아가곤 했던 친구의 카페가 내부공사를 한 것처럼 모든 건 사라져 간다. 아니,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지 변해가는 거다.
아주 오랜 후에 내가 30대쯤, 변해버린 공원을 찾아갈지도 모른다. 한숨을 쉬고, 모든 게 이미 오래 전에 변해버렸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하늘은 더 이상 맑지 않고, 공기도 달라진다. 그래도 장난처럼, 이봐 정말이야 피크닉을 나온 것 같아, 라고 그녀에게 말해보리라.
그럼 그녀는 아니, 피크닉은 끝났어, 라고 말할지도.
하지만 그녀는 없다. 나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한없이 슬퍼진다.
- '공원'(1995)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