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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물고기군 2002. 1. 16. 03:53

일요일에 절에 다녀왔다. 집에서 거의 두 시간 거리에 있기 때문에 아침 6시 반쯤에 집을 나서야만 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밖은 이미 환했다. 날마다 날마다 아침이 오는 시간(혹은 밤이 오는 시간)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 자체가 이미 나에게는 매우 신성한 '어떤 것'이었다. 시간의 축을 누군가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옮겨 놓는 것.

처음, 그 절을 가려고 집을 나섰던 것은 2년전, 그러니까, 스무살, 겨울이었다. 겨울이었으므로, 여섯시 쯤이라도 밖은 아직 어두웠다. 엄마가 나를 절에 보냈던 이유는, 내가 불심이 강하기 때문에 일요일마다 부처님 곁에서 봉사를  해야한다는, 좀 독특하고 어이없는 것이었다. (물론 무보수는 아니었다.)

불심이 강했든 어쨌든, 보수가 있든 없든, 나는 그 때 절에 가는 것이 싫었다.  절은 너무 멀었고, 가봤자 모르는 사람뿐이 없을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 지하철 역까지 가는 것이 싫었다. 어쨌든 나는 그 절에 갔다. 

내가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빈 버스가 지나가고,  날카로운 새벽 겨울의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가끔씩 조깅하는 사람들이 건강한 걸음걸이로 나를 지나갔다. 나는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는 5분정도의 시간동안 내내 풀이 죽어있었다. 갑자기 우뚝 서서, 가방에서 워크맨을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일부러 그것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는데(아침에 워크맨과 책상에 있던 아무 테이프를 가지고 나왔었으므로) 그 안에 들어있던 테이프는 '피아졸라'였다. 아마도 기돈 크레머가 연주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지하철을 한번 갈아타고 버스를 한번 갈아탔다. 산 중턱에 있는 절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야 했던 것이다. 나는 신도들의 틈에 끼어서 버스를 기다렸다. 어째서인지, 그 곳에 걸려있었던 빨간 숫자의 디지털시계가 또렷이 내 머리 속에 남아있다. 7:10이라고 빨간 숫자가 미세하게 깜박 깜박거리고 있었는데, 내 귀에서는 여전히 기돈 크레머의 피아졸라가웅웅거리고 있었고, 한 초췌한 남자가 비닐봉지를 들고 신도들에게 구걸하고 있었고, 뿌옇게 어둔 하늘에 비둘기들이 날아올랐다. 나는 그 때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나는 그때 '영원' 이라는 단어를 믿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때 내가 떠올렸던 그는 내가 항상 끝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나를 비난하곤 했었다. 아니, 그는 나를 비난이 한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끝'을 생각하는 것과 '영원'을 생각하는 것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 해 겨울 우리는 늘 싸웠고, 나는 아주 많이 울었다. 가끔씩 그가, 이제 그만해, 라고 말했다. 겨우 이년전의 일인데도 그 때를 생각하면 아주 오래된 일인 것처럼, 나는 아주 뭉툭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절로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얼어버린 계곡 물을 보았는데, 흐르던 그대로 얼어있었다.  바위와 바위사이마다 얼어버린 물기둥이 허옇게 나 있었다. 무엇을 저렇게 '흐르던 그대로' 멈추게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적어도 '끝'은 오지 않을 텐데, 그 때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겨울, 탱고, 입김, 비둘기 때, 얼음, 시간, 

이제, 나는 피아졸라의 탱고가 없이도 절에 간다. 지하철 안이나 버스안에서는 잠을 청하고, 절에는 아는 사람들이 제법 생겼다. 

참 이상한 것은 그해, 겨울, 나는 죽을만큼 힘들다고 늘 생각했었지만, 정작 지금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참 아름답지 않았었나, 하고.  마치, 그 때 내가 듣던 탱고처럼.    

* 손보미, '탱고', 들녘 '문리대 앞 벤치', 2001.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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